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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림지 경호루에 담긴 사연

제천의림지

by 정홍철 2013. 3. 18.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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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루와 홍순간 선생


삼한시대 최고의 수리시설인 제천 의림지 서편에 자리 한 명소. 경호루(鏡湖樓)에 얽힌 사연이 있다. 고려대학교 홍일식(洪一植)[각주:1] 前총장의 부친인 홍순간(洪淳艮, 1902~1980, 호 海雲)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다.


제천문화원 한상백 이사는 필자에게 책 한권을 건네 주셨다. 고려대학교 홍일식 前총장이 1993년에 펴낸 <21세기와 한국전통문화>에 제천과 경호루, 부친과 관련된 사연이 담겨 있는데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호탕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아버님의 호탕하신 성격의 한면을 하나 들어보기로 한다.


아버님의 옛 친구로 1948년에 정부가 세워지고 나서 바로 충청북도 제천의 군수로 있던 김득련 씨란 분이 계시다. 아버님은 김 군수의 초대로 삼한 시대부터 내려오는 그곳의 저수지인 의림지에 가시어 며칠 동안 그 아름다운 풍치를 돌아보며 술을 드셨다.


그곳은 지금도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특히 붕어의 창자로 요리하는 회 안주가 유명했다.


기분이 거나하게 좋아지셨을 때에 서로 운자를 내어 한시로 화답하시며 즐기시다가, 이 유서 깊은 의림지에 어울리는 정자가 하나도 없음을 탄식하시고 그 자리에서 김 군수의 재임을 기념하여 그곳에 멋진 정자를 하나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서울로 돌아오자 곧 큰돈을 내려보내어 날아갈 듯한 정자를 짓고 호수가 비치는 거울이라는 뜻으로 경호루(鏡湖樓)라 이름지었다.


다행히도 6.25 동란 때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서 지금도 그곳 의림지를 찾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고 있다. 이 내용은 뒷날 내가 어머님을 모시고 직접 의림지를 찾아가 경호루에 걸려 있는 판액 <경호루기>로도 확인해 본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도 그때의 마음을 적어놓은 아버님의 칠언율시가 적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님은 요샛말로 하는 재벌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중류에 지나지 않는 실업인일 뿐이었는데 다만 성품이 이처럼 호탕하시어 보람있는 일에 돈을 쓰실 때에는 천금을 아끼지 않으시는 멋을 지녔을 따름이다...


홍순간 오세진 두 선생의 특별지원의 도움으로 경호루가 지어진 것은 안내판과 <경호루기>에도 소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내판

제천시 향토문화자료 제23회. 경호루는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의림지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1948년 당시 제천군수 김득련(金得鍊), 서장 김경술(金京述)의 발기로 서울의 홍순간(洪淳艮), 오세진(吳世鎭)의 특지로 목조와가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을 창건하였으며 이익공 팔작집으로 단청이 되어있다. 영호정과 더불어 의림지를 찾는 관광객들의 대표적 휴식처가 되고 있으며 특히 아름드리 노송 사이에 서있는 정자누각은 한폭의 그림과도 같다.


<경호루기>

경호루가 소재한 충청북도는 내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큰 호수나 강물이 없고 오직 제천에 의림지가 있으므로 못을 호수라고 칭하였으나, 충청도를 호서(湖西)라고 이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한번 사경(寫景)을 보려고 하였으나 인연이 없어 보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광복 후 3년인 정해년(1947) 봄에 내가 외람되게 이 고을 군수로 부임하니, 군청에서 호수는 겨우 복과(腹果)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부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곧바로 호수에 가보니, 호수는 바로 신라시대 박후(朴侯) 의림(義林)이 백성들을 위해 수리시설(水利施設)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주위는 5~6리, 깊이는 40~50척, 제방은 산처럼 높고 나무는 모두 아름드리 고목들이며 한 자쯤 되는 물고기들이 아름답게 가득하니, 진실로 크고 오래된 호수였다.


지금 보건데 이는 하늘이 만든 것이고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듯하니, 아마도 천연적인 지형으로 인하여 사람의 공력을 다하였나 보다.


동쪽에는 우륵대(于勒坮)와 연자암(鷰子巖)이 있고 서쪽에는 용폭(龍瀑)과 홍류동(紅流洞)이 있으며, 남쪽으로 크게 밖으로 나열된 것은 칠성봉(七星峰)이고 북쪽으로 구름 가운데에 우뚝 솟은 있는 것은 용두산(龍頭山)이 있다.


사방으로 부앙(俯仰)함에 하나도 뜻에 합당치 않은 것이 없으니 유유(悠悠)하고 양양(洋洋)하여 구루(句漏)의 소원을 이제야 이루었다고 하겠다.


이 후로 아름다운 시설과 한가한 날에는 여유롭게 찾아가노니, 관리와 백성들이 늘 서로 만나 즐겼고 수목(樹木)과 물고기들도 또한 기쁘고 기쁘게 여기며 서로가 즐거워하였다.


나의 즐거운 뜻으로 이 풍경을 보면 한 가지도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해 10월 보름날, 두 분의 손님이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놀았으니, 바로 홍군(洪君) 순간(淳艮)과 오군(吳君) 세진(世鎭)으로 모두 활달한 풍류남아였다.


함께 풀밭에 앉아 시(詩)를 읊고 배를 띄워 술을 마시다가 내가 번연(翻然)히 마음속에 느낀바가 있어 외모에 나타나니, 두 분 손님이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나는 답하기를, “박후 의림은 백성들에게 혜택을 끼침이 이처럼 크므로 백성들이 그를 잊지 못하고 그의 이름으로 호수 이름까지 지었는데, 나는 보잘 것 없는 재주(斗筲之才)로 백성들에게 털끝만큼도 혜택을 주지 못하니 내가 느끼는 바가 첫 번째이고, 옛 정사(亭榭)와 누각(樓閣)은 수십 개이지만 지금은 빈터가 되어 다만 깨진 기왓장과 주춧돌만이 남아있고 유독 이씨(李氏, 李集慶)의 영호정(暎湖亭)이 우뚝이 영광전(靈光殿)과 같으나 유람하는 관광객은 한도가 넘어서며 의지하여 수용할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의 누각을 짓고 싶으나 힘이 부족하니 내가 느끼는 바가 두 번째이다.” 하니, 두 분 손님이 흔연(欣然)히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누각을 지을 경우 우리 두 사람의 주머니를 기울이면 누각 하나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어찌 아까워 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또한 흔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우리 고을의 큰 은혜이다.” 하고, 즉시 요우(僚友)인 이재형(李宰衡)과 모획(謀劃)하여 좋은 재목과 단단한 기와를 구하고 훌륭한 장석(匠石)을 불러 이 일을 맡겼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10월에 준공하니, 누각이 모두 6칸인데 높다란 2층으로 꾸몄다.


이는 백성 한 사람의 힘도 들이지 않고 오로지 두 분 손님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다. 누각 위에서 바라보면 숨겨진 것도 나타나고 먼 것도 가깝게 보이고 높은 것도 높지 않게 보여 교태와 아름다움을 뽐내며 앞에 나열된 것들이 모두 기이(奇異)한 형상과 특이한 모양들이다.


가장 뛰어난 경치는 호수의 빛이 마치 둥근 거울을 새로 펴 놓은 듯 깨끗하여 티가 없으니 누각 위에 앉은 자는 마치 거울 가운데 앉아 있는 듯하다.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누각은 이름이 없을 수 없고 이름은 허황되게 지을 수 없으니 실제대로 이름을 짓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모두들 좋다고 하므로, 이에 현판을 ‘경호루(鏡湖樓)’라고 하였다.


대저 거울은 사람의 모습을 비추어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것이니 이 호수의 거울로 내 마음을 비추어 전일의 잘못을 제거하고 영대(靈臺)의 밝음을 회복한다면 이 누각에 오르는 자는 한갓 관광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덕(德)에 나아가는 방도에는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인하여 그 사실을 차례로 서술하여 기문(記文)을 짓고 이어 시(詩)를 지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의림호(義林湖) 머리에 경호루 높이 지으니,

온 천지의 풍경, 세상 시름 잊게하네.

처마 끝나는 듯하니 5월에도 서늘하고,

현판(懸板) 모습 환하니 천추(千秋)에 빛나리라.

바위는 제비 앉은 듯하니 창태(蒼苔)가 오래되고,

폭포는 용(龍) 울음소리 내니 백옥(白玉) 같은 물 흐르네.

이곳에 오는 수많은 관광객들,

울적한 회포 잊고 무한한 흥취(興趣)에 도취하리.


단기 4281년(1948) 무자 소춘(小春, 10월)에 군수 김득련이 기문을 쓰다.


<鏡湖樓記>

忠北之道陸於中而無巨湖大江之水惟堤川有義林池池而稱湖湖西之名以此也余欲一寫目而無因焉我國光復後三年丁亥春猥守是郡郡治之距湖纔腹果之地下車未幾卽至湖湖卽新羅時朴侯義林爲民灌漑而鑿之者也其圍可五六里其深可四五十尺其堤如山之高其木皆老大成抱其魚鼈盈尺於牣洵巨湖也古湖也以今觀之是天作非人作豈因天形而加人功歟東有于勒坮鷰子巖西有龍瀑紅流洞南則羅列於大野之外者七星峰也北則聳出於雲霄之中者龍頭山也俯仰四眄無一不可於意者悠悠乎洋洋乎句漏之願於是遂矣自是佳時閒日則施施而往漫漫而游吏民常相遇而歡樂之草樹魚鼈亦若欣欣然相樂也以吾樂意觀之無一不樂者是歲十月之望二客自京而來從余而游卽洪君淳艮吳君世鎭皆風流豁達人也相與坐草而咏泛舟而飮余翻然有感於中而形於外二客怪而問焉余曰朴侯義林遺民利澤如是之大民思之不忘至以其名名湖余以斗筲之才無絲毫利澤於民余之所感者一也古之亭榭樓閣以十數今爲墟只有破瓦斷礎獨李氏之暎湖亭兀然如靈光不能容游觀人之徙倚余心營一樓而力不能焉余之所感者二也二客欣然而笑曰君若有營傾吾二人之槖可一樓焉何難之有何惜之有余亦欣然而笑曰能如是吾州之大惠也卽與僚友李衡宰謀畫之求美材堅瓦招匠石而任之越明年十月工告訖樓凡六間爲二層而高此乃不用一民之力而專二客之力也自其上而望之隱者見遠者近高者不高獻巧效伎於前者皆奇狀異態之物也最是湖之光如圓鏡之新開瑩澈無瑕坐樓上者如坐鏡中余諗于衆曰樓不可以無名名不可以以虛以實名之何如咸曰可乃額曰鏡湖樓夫鏡所以照形而去汚也以湖之鏡照吾心而去其舊染之汚復其靈臺之明則登斯樓者不徒遊觀之美其於進德之方不爲無助矣因序次其事而爲記繼之以詩詩曰

鏡樓高築義湖頭

滿地風光却世愁

檐角如飛凉五月

楣容自照耀千秋

岩成鷰坐蒼苔古

瀑作龍吟白玉流

到此游觀多少客

鬱懷易散興難收

檀紀四二八一年戊子小春知郡金得鍊記


  1. 홍일식(洪一植) 1936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고려대학교 제13대 총장(1994.6~1998.6). 제1회 세종문화상 수상(19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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