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이범우(李範雨)선생의 묘소는 세명대학교 후문을 올라가기 전 우측 해오름 원룸 바로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 '애국지사 이범우 선생 묘소' 간판이 서 있으며 도로변에서 바로 보인다.
이범우 선생 묘소 전경
이범우 선생 사적비 정면
이범우 선생 사적비 우측면
이범우 선생 사적비 뒷면
공의 휘는 범우이고 자는 홍구이며 성은 이씨니 경주인이다.
임진 1892년 10월 29일 제천 모산리에서 출생하였고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여 자손을 법도 있게 훈회(訓誨)하였다.
시조 휘는 알평(謁평)이고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이요 세상에서 익재(益齋)선생이라고 추앙(推仰)을 받는 휘 제현(齊賢)은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이 정월(貞越)한 려조(麗朝)의 명신(名臣)으로 공의 21대조이다.
이조에 들어 와 휘 윤인(尹仁)은 관찰사(觀察使)요 아들 휘 공린(公麟)은 현감(縣監)이요 아들 휘 원(鼋)은 등제(登第) 후 예조(禮曺) 좌랑(佐郞)으로 호는 재사당(再思當)이니 박취금헌(朴醉琴軒) 휘 팽년(彭年)의 외손이며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되어 유배되였다가 갑자에 효수(梟首)되였다 중종때 설원(雪冤)되여 도승지니 공의 14대조이다.
휘 대일(大逸)은 사과(司果)로 공의 11대조이며 후손이 모산에 우거(寓居)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제천군청잠업계에 근무하였으며 고종황제 국상 때 제천대표로 서울에 파견되자 최린으로부터 항일투쟁할 것을 교육받고 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귀로에 강원도 횡성 한영교와 원주 이연호에게 거사를 부탁하였다.
3월10일 제천에 도착하자 마자 동지 권종필 이기하 전필현 등과 모의하여 3월17일(음력, 양력4월17일) 정오로 시위일시를 정하고 장두성은 단양에서, 차은성은 영월에서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조명구 등 20여명으로 하여금 제천읍 하소리 용바위 밑에서 하루 종일 은신하여 태극기 천여매를 만들고 17일 모여드는 장꾼에 나누어 주고 정오를 기하여 일체만세를 부르도록 만반준비를 하였다.
17일 정오 공은 권종필 이기하 김필현 등과 같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하니 이날 운집한 장꾼 학생 합세하여 뒤를 따르고 읍내로 전진하여 경찰서에 당도하니 왜병들은 발포하여 저지하고 해산시켰다.
이때 봉양사람 2명 영월사람 1명 단양사람 1명이 총에 맞았다.
흥분한 군중들은 굴하지 않고 읍내 전원을 돌아 다니며 만세고창하며 시위하였다.
공은 목이 쉬고 피가 온몸에 낭자하였으나 용기가 배가되였고 연초소매상 일본인 동근도 감탄하여 결사투쟁하는 모습을 보고 담배 한 갑을 대접하였다.
이날 자정까지 시위를 벌리며 우국론을 벌리다가 매국노 형사 사동근(史動近)에게 체포되여 감금되였고 3년간 복역하였다.
해방광복 후 공은 의림지에 영호정을 중수하여서 친교들과 시주로 낙을 삼았으며 존이(示+耳)돈족 사업에 여력을 기우렸다.
6.25사변 후 역시 황폐된 영호정을 수축하였다. 초비 평산신씨, 계비 창녕조씨이고 장남 상기는 6.25사변에 사망하고 사손 동희와 손 남희가 있다.
정부 당국의 각별한 배려와 제천향교 김규린 전교 및 경주이씨 제천 모산 사과공파 문중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공의 항일투쟁사를 엮어 사적비를 건립하다.
병인 1986년 11월 25일
익재공 후예 상엽근찬 동우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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