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3월 12일 추모비 제막식 장면. 한필수 선생이 제막식을 진행하고 있다. <제천문화50년사>(제천문화원)
현존하는 삼한시대 최고의 수리시설인 제천의림지 제방에는 애국지사 이범우(李範雨)선생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70년 3월 12일 애국지사 이범우선생사회장 장의위원회 명의로 건립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추모비의 글씨는 한필수(韓弼洙. 음력1900. 11. 6~ 양력1986. 4. 10. 제2대 국회의원, 제천중학교 설립자)의 친필이다.
일부 기록에 이범우 선생은 1919년 3월 3일 고종의 국장에 참석한 후, 독립운동에 동참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제천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재돼 있는 제천지역의 3.1만세운동과 이범우 선생에 대한 기록이 상이한 실정이다. 어느 자료가 정확한지 판단하기가 난해하다. 이를테면 거사일에 대해 추모비는 1919년 3월 12일 제천장날(2일 7일장)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떨어져 있는 묘소에 함께 건립돼 있는 사적비에는 3월 17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정부의 공훈록에는 4월 17일로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공훈자료에는 3월 17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함께 거사에 동참한 이맹삼선생의 공훈록은 4월 17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한달여 앞서 3월 18일 순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맹삼(李孟三 : 1867. 11. 7~1919. 3. 18 이명 : 喜敏) 충북 제천(堤川)사람이다.
1919년 4월 17일 제천군 제천면(堤川面)에서 이범우(李範雨)・장용근(張用根)・이기하(李起夏)・권종필(權鍾弼)・전필현(全弼鉉)・조명구(趙命九)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장날을 기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제천 남부지역의 책임자로 많은 주민을 이끌고 시위하던 중 일군 수비대의 위협으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그날 오후 6시쯤 다시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주재소로 향하여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의 무차별 사격에 복부관통상을 입고 이튿날 새벽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3월 17일 거사하여 일경의 총탄에 복부관통상을 입고 이튿날 새벽에 순국하였는데 앞선 문단에는 4월 17일 거사에 동참했다는 것은 말이 맞지 않는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추가로 게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추모비 전문이다.
공은 경주이씨 팔별후예로 1892년 10월 29일 모산에서 나시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강직한 성품과 뜨거운 애국심은 인근에 명성이 높았다.
민족의 분노가 폭발하든 기미 3.1독립운동 그때에 공은 약관 28세이었다.
뜻을 같이한 권종필 전필현 이기하 투사들과 뭉치여 3월 12일 제천 장날을 기하여 수백군중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그의 함성은 천지가 흔들이는듯 방방곡곡에 메아리첫다.
그날 왜헌에게 잡히여 옥고 3년 6개월 그러나 그기개 더욱 푸르렀고 후진양성과 민족정기를 교양하기에 침식을 잊으며 삼간두옥에 둔거 왜인을 대함이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술잔을 들고 비분의 전날을 되색이던 공의 장한 영자 이제 민족 증흥의 거름으로 1969년 9월 21일 78세를 일기로 영겁으로 가시니 용두산 푸른솔 의림지 맑은물과 더브러 청사에 길이 남은 표표한 유덕을 추모하여 그 공을 여기에 적음.
1970. 3. 12. 애국지사 이범우선생사회장 장의위원회
이범우 선생 추모비는 이곳저곳이 세월의 풍파로 훼손됐다. 후손들의 정비가 뒤 따라야 할 것이다.
기미년(1919)년 4월 17일은 음력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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