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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의암집 중...러시아문화...최재형 권업회

역사속으로

by 정홍철 2012. 6. 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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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질구레한 이야기(瑣記)

계축년(1913)

 

경기도의 어느 읍에 한 상인(常人)이 힘써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하루는 부부가 밭에 나가 김매기를 하였다. 집에는 그의 늙은 어머니가 있어 젖먹이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아내는 저녁밥을 짓기 위하여 먼저 집에 들어오니 그 시어머니는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물어보았으나 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물으니 목매이면서 말을 하는데 나는 차마 얼굴을 대하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앞내에서 아기를 안고 다리를 씻는데 실수를 하여 아기는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나는 힘이 없어 구하지 못하였으니 나도 따라 빠져죽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고 하였다. 며느리가 말하기를

 

“어머님 조금도 슬퍼하지 마소서. 또 마땅히 자식을 낳아 어머님은 손자를 볼 것이니 다만 어머님이 너무 슬퍼하여 기운을 상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곧 닭을 잡았다. 남편이 조금 뒤에 오니 어머니가 그 일을 말하고 전처럼 슬퍼하자 위로하기를 아내의 말과 같이 하고 곧 아내를 향하여 말하였다.

 

“우리 어머니께서 반드시 기운을 상하셨을 것이니 속히 닭을 잡아 삶아 올리시오.”

하였다. 아내가 말하였다.

“이미 삶았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나이 젊었을 때 본생(本生)의 재종조 계양공(桂陽公)에게 들었는데 그 땅과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였다. 아! 이것이 소위 성선(性善)이라 사람들은 모두 요순과 같은 것이니 또한 소중화 예의의 나라 때문인가?

 

러시아의 영토 추풍(秋豊)이란 곳은 러시아에 입적한 한국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느데 어떤 러시아 사람이 그의 아버지에게 심히 박대하는 것을 보고 항상 싫어하였다. 러시아의 풍속에 명절에는 사람들이 불당(佛堂)에 가서 스스로 그 죄를 호소하는데 죄를 면하기를 빌면서 징계하고자 하는 무리가 모두 스스로 아버지에게 박대한 것을 호소하니 러시아 사람이 들으러 왔다가 3․4명이 놀라 말을 못하게 하였다. 여러 사람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였다. 러시아 사람이 마음에 부끄러워 그 행실을 고치고 점점 부모를 잘 섬기니 이를 보면 중국의 도로 교화된 것이니 이적도 변할 수 있다.

 

영변(寧邊)의 남산 김씨는 친족이 많고 선산의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일심으로 가꾸었다. 운산(雲山)의 금광을 할 때 서양 사람이 소개하는 사람을 보내어 나무를 취하여 사려고 하였는데 우봉(愚峯) 김영준(金榮濬)이 문중에 발의하여 물리치니 다시 소개하는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묘에 가까운 나무는 베지 않고 베면 후하게 값을 줄 것이요 베지 못하게 하면 값을 주지 않고 다 베어버리겠다.” 하였다. 우리가 말하기를

“그들이 세력이 있어 베는 것을 금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성을 가진 수천 명이 차라리 나무를 안고 죽을 것이니 그 세력으로 나무와 사람을 다 베어 버리라.”고 하니 서양 사람이 드디어 중지하였다.

 

다시 일본 사람이 와서 그들의 시조 산의 기른 소나무를 베고 한 쪽으로는 값을 보내왔다. 대체로 그 때 도처에 소나무를 베더라도 감히 누구냐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수백 명이 그 곳에 갔는데 일본 사람은 이미 갔고 다만 중간에서 일하는 자만이 있었다. 종친의 여러 사람이 묘에 고하여 산소를 제대로 수호하지 못하여 죄를 졌다고 하고 중간에 있는 사람을 잡고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일본 사람에게 말하라 우리의 종친이 각각 나무를 안고 설 것이니 먼저 사람을 베고 나무를 베라.”고 하고, 온 종친 수천 명이 나무마다 이름을 써 붙이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으니 일본 사람이 중지하고 다시는 범하지 않았다. 혹자가 권하기를 이미 벤 것은 마땅히 값을 받으라고 하였다. 김씨는 말하기를 “값을 받으면 죄가 되니 그 땅에 그냥 썩게 하라.”고 하였다.

 

김씨들은 성품이 강직하여 워선(爲先)하는데 성실함은 다시 말할 것이 없었다. 아! 우리나라의 사람마다 선왕의 강토를 사랑하기를 김씨의 선산의 소나무를 사랑하듯 하면 어찌 일본 사람에게 나라를 잃는 데까지 이르렀을까?

태천 박징사 운암(朴徵士雲菴)이 죽은 뒤에 막내딸이 정주의 조씨에게 출가하였다. 어머니를 보려고 친정에 와서 베를 짜고 있다가 남편이 소년 시절에 신식 학교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는 소식을 뜯고 북을 던지고 베틀에서 내려와 누워 음식을 끊고 죽고자 하였다. 그 어머니가 밥을 먹기를 권하니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남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살아서 장차 무엇 하겠습니까? 비록 모정을 상하게 하는것이오나 스스로 속이 상하여 목숨을 끊기로 결의하고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급히 사위의 집에 심부름 하는 사람을 보내자 사위는 곧 나가 글을 배우고 머리를 기르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니 비로소 음식을 나오게 하여 먹었다. 연약한 부녀의 몸으로 능히 남편의 허물을 고쳐 세상의 교화를 중하게 한 점이 있으니 진실로 어질도다. 그의 어진 아버지가 화서 선생의 의리 학문을 받아 점점 교화를 입음이 있어 그런 것인가?

 

어느 읍의 전 오위장(田五衛將)의 막내딸은 성품이 호방하고 기운이 장사였다. 여자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교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았다. 하루는 가까운 마을의 사나운 불량배들 몇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이웃 사람을 문 앞에서 마구 구타를 하였는데 모두 그들을 꺼려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이 딸이 곧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 구타하여 쫓으니 아버지가 말하였다.

 

“너는 시집도 가지 않고 싸움에 진(陳)을 안다고 하였다.”

막내딸이 말하였다.

“전 오위장 가문은 전에는 아름다운 전씨의 진(陳)이었는데 전 오위장 막내딸은 진을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혼사를 의논하는데 미쳐 부모와 형제가 가부의 말이 있었는데 딸이 말하였다.

“혼사를 의논하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들려주지 않습니까?”

부모가 꾸짖어 말하였다.

 

“미친년아 어찌 규중에서 큰 사람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라고 하니 딸이 말하였다.

“혼인할 사람은 나인데 내가 듣지 않음이 가합니까?”

하고 큰 소리로 웃으니 오빠가 꾸짖고 또 가만히 있으라고 고하면서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 시집갈 집은 최씨이니 그 집 문에 들어가면 감히 그 품성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느냐? 시부모에게 공손하게 하고 남편을 공경하여 받들 것이며 집안 친척에게도 공경하고 모든 처사를 사리에 맞게 하면 남편의 온 집안이 너를 중히 여기리라.”

 

하였다. 남편의 종제 한 사람이 동학(東學)을 하다가 일진회(一進會)에 들어갔는데 하루는 칼을 갈아 가지고 들어가 물어 말하였다.

“장차 남편의 종제를 죽일 것이다. 최씨 문중의 일은 마땅히 최씨 문중에서 처치해야 하는데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나 또한 최씨 문중의 사람이 되었으니 부득불 최씨의 문을 위하여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을 알게 하고 일진회를 하는 자도 반드시 죽을 것을 알게 하리라.”

 

하자 남편의 종제가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면서 행동을 고칠 것을 청하였다. 이는 가히 의협 남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들려줄만 하다.

영원(寧遠)의 좌수(座首) 한모(韓某)는 을미년(1895) 삭발의 화를 당하여 이곳 수령이 삭발령 보다 먼저 따라 머리를 깎고 명령을 민간에서 실행하게 하니 좌수 한모가 말하였다.

 

“어찌 차마 부모가 주신 몸을 훼손하여 금수의 모양으로 하며 또 이것으로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는가?”

하고 드디어 자결하여 죽었다. 나는 곧 한이호(韓履浩)에게 알렸더니 뒤에 그의 손자 모(某)가 나를 찾아 춘천의 산중에 와서 말하기를 “좌수로서 대절(大節)에 죽었으니 수령이란 자가 부끄러워하여 죽지 않고 살아서 간단 말입니까?”하였다. 당시에 부끄러워 죽은 자가 어찌 한이 있을까마는 얼마 있다가 머리를 깎는 것으로 극히 능사이며 도리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삭주(朔州)의 최사인(崔士人) 모는 9대를 함께 살았다. 내가 그 말을 듣고 흠모하여 한 번 방문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옛날의 장공예(張公藝)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더니 오늘날 우리나라에 또 이런 일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서양의 풍속에는 부자가 함께 살지 않는 것으로 법을 하고 세계가 그것을 사모하면서 문명의 나라라고 칭한다.

 

개천(价川)의 현애춘 희봉(玄藹春熙鳳)은 숭화재(崇華齋)를 세우는데 가장 힘썼고 나와 더불어 정이 매우 독실하였다. 가정의 법도가 올바름이 관서에서 제일이었다. 우선 한두 가지의 일을 들어 말하면 7대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법도를 삼아 제사에도 단술을 쓰고 술을 쓰지 않았다. 7대조가 조[粟]를 타작하고 그 집 더미를 쌓고서 돌아가시니 7대동안 그 집 더미를 이어 덮어서 전해오니 내가 눈으로 보았다.

 

그 집에 전하여 내려오는 전체의 규모를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자손이 된 자는 마땅히 영원히 지켜 버리지 말아야 하고 나도 그 집 더미를 보고 흠탄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태천의 백직손(白稷孫) 집에는 16 대를 전해 내려오는 나무 더미가 있고 가산(嘉山)의 김열수(金悅叟) 집에는 5대조의 쌓은 나무 더미가 있다.”고 하니 일의 상태가 이와 비슷하다.

 

영춘(永春)에 사는 오위장 김모(五衛將 金某)는 옛날에 제천에서 의거를 할 때 후군장 정운경(鄭雲慶)의 종사관이 되어 원주의 경내를 파수할 때에 민영기(閔泳綺)가 충주 관찰사가 되었는데 충주가 병화(兵火)를 겪어 원주로 도임하니 듣는 즉시 곧 결박하여 잡아 왔다. 민영기는 그 때에 사실상 의병을 도운 자인데 알지 못하고 그렇게 한 것이요, 명령이 없이 자행한 것으로 잠시 베일 뜻을 보인 일도 있었다.

 

뒤에 서상무(徐相懋)가 서간도(西艮道)를 관리할 때에 함께 가서 주선하고 지나다가 나를 개천에서 보게 되니 오히려 씩씩한 기운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러시아의 영토에 들어가 연추(蓮秋)에 이르렀는데 뜻밖에 여기에 와서 이관리 범윤(李管理範允)의 장병이 되어 무산(茂山)에 나가 싸우다가 패전하여 죽으니 그 소식을 듣고 이관리와 함께 산에 올라 망곡(望哭)을 하였다. 아! 그는 시종 의병을 하다가 죽었다. 대체로 그는 사무에 힘을 베풀고 잘 지휘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를 좋아하였다.

 

옛날 제천에 있을 때는 미처 수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는데 이 곳에 있어서는 의병의 대열에서 제일의 인물이 되었으니 인물의 드러나지 못함이 이와 같도다. 형편상 시체도 거두지 못하고 또 길이 멀고 막혀 집사람에게도 알려주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영남의 한 소년이 몇 몇 대동안 집에 행실이 있고 문필(文筆)이 있었는데 삭발을 하고 신학(新學)을 하였다. 러시아 영토에 놀면서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삼강(三綱)은 보존되어야 하지만 오륜(五倫)은 쓸 데가 없다.”고 하니 우리나라는 오륜을 숭상하였고 영남은 또 추로(鄒魯)의 시골이라고 칭하였는데 저 사람이 어려서 집에서 훈계를 받고 성경을 읽었어도 오륜이 없어져도 좋다고 무난하게 말을 하니 기타의 사람들을 알 수 있다.

 

예의의 국속이 몇 년 사이에 이 지경에 이르렀도다. 그의 뜻은 대체로 말하자면 군신이 있어 나라를 위하고 부자가 있고 부부가 있어서 나서 길러주고 생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유(長幼)나 붕우(朋友) 같은 것은 긴요하게 매인 바가 없으니 평등 자유가 마땅한 일이요, 어찌 윤리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른 바 삼강은 윤리 도덕이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었다.

 

군왕이 신하에게 견제되고 아버지가 자식에게 굴하고 남편이 부인에게 제압되면 윤리를 배반하는 것이요, 집을 나가면 어른에게 공경하는 것은 이 사람의 정당한 예의요, 친구 간에 함께 강하고 배우는 것은 윤리를 밝히는데 의한 것이니 저 사람은 일찍이 듣지도 못하였던가?

 

우리나라는 예의를 숭상하고 윤리를 돈후하게 하여 집에서는 낳아서 길러주는 도리를 다하는데 힘쓰고 상사나 제사에 이르러서도 더욱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3년 동안 상사를 치르고 4대를 제사를 지내고 먼 선조에는 묘사(墓祀)를 지낸다. 비록 상인 하천(常人下賤)이라도 울면서 전(奠)을 올리고 의관을 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법식을 따라 어김이 없었다. 내가 러시아의 영토에 들어오니 본국에서 와서 사는 자는 보면 모두 예의를 지키고 러시아에 입적한 자도 초상에는 반듯이 궤연(几筵)을 만들고 음식을 올리며 상복을 입고 슬퍼하고 제사는 기일에는 제위(祭位)를 만들고 명절에는 묘에 올라가며 혹 상투를 하고 의관을 한 자도 있었다.

 

내가 연추(蓮秋)에 있을 때에 최재형(崔才亨)이 어린 나이로 와서 입적(入籍)하여 깊이 러시아의 풍속에 물들은 자이다. 그 때에 자부가 친정아버지의 상사를 만나니 때때로 나를 향하여 예절을 물었다. 나는 마음으로 기특하게 여겼다. 본국에서 소위 개화한 유지(有志)요, 신학을 한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부모의 상사를 듣고도 곡도 하지 않고 상복도 입지 않고 곧 사회를 주선한다고 하면서 두루 다니면서 선동하여 풍속을 변화시키고, 상사에는 궤연을 설치하는 일을 비방하여 거기에 변한 자가 적지 않았다.수년 사이에 이와 같으니 다시 조금만 지나면 초상이나 제사를 행하는 자가 없어질 듯하니 극악무도한 신학을 한 자들이다. 본국에는 지금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오백년 동안 오래도록 쌓아 법을 이룬 것이 몇 해 가지 않아 무너져 와해되니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다.

 

내가 처음에 러시아의 영토로 들어와서 우리나라 사람이 본래 러시아에 입적한 사람과 새로 와서 우거하는 자가 있었다. 본래 입적한 자는 비록 삭발을 하였더라도 모두 순후하고 예스러운 뜻이 있었고, 새로 우거하는 자는 간혹 삭발을 하였지만 오히려 본국의 뜻과 모습을 잊지 않은 나머지 모두 삭발하지 않고 우리의 동반자가 노는 곳을 좋아함이 있어 혹 머리를 기르고 상투를 하는 자가 있더니, 신학문을 한 자가 국내로부터 와서 상투를 한 자를 흔들어 다시 깎게 하여 머리가 있는 자도 많이 깎게 하였다.

 

명천(明川)의 이종호(李鍾浩)가 소위 권업회(勸業會)라는 것을 만듦에 미처 사람들을 강제로 회에 들어오게 하고 러시아의 국적에 들어가게 하여 머리를 깎은 자가 강제로 반은 되게 하였다. 또 청년들을 귀하게 여기고 노성(老成)한 자를 모멸하니 이것으로 풍속을 이루어 각 집에서는 아비나 노인들이 자제들에게 굴복하고 내외로 변하는 모습은 날과 때로 같지 않으니 본국에도 또한 이러한데 이를 것이다. 퇴폐한 세파의 모습을 어떻게 저지할까?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한다.

 

러시아 사람의 여인은 가끔 남편이 죽으면 개가(改嫁)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호영(湖營)의 가까운 땅에 남편이 죽어 묘를 지키는 자가 있었는데 관청 사람들이 중하게 여겨 집을 지어주고 거쳐하게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에 그 아래를 지나면 여인이 묘의 눈을 쓰느라고 애를 쓰니 그 뜻을 가엾이 여겨 대신 쓸어주기도 하면 여인이 치사하고 돈을 주어도 받지 않았다. 장하다! 천성이 밝아 묻어 없어지기 어려움이여! 치우친 바탕에 두텁게 막힌 속에서도 스스로 나타남이 있어 마지않으니 만약 중화의 삼강(三綱)의 도리로서 그 나라를 가르쳤다면 혹 미련한 이적은 면했을 것이다. 참으로 아깝도다.

 

함경북도의 성진(城津)에 어떤 사람이 야소교(예수교)에 현혹되어 그 아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니 아들이 즐겨하지 않음에 강제로 독촉하여 견디지 못하는데 이르렀다. 아들이 부득이하여 교에 들어가서 들어가던 날에 곧 아버지를 형이라고 부르고 자칭 아우라고 하고 다시 아버지를 홀대하니 아버지가 크게 놀라 그 이유를 물었는데 아들이 말하였다.

 

“참된 아버지는 천주(天主)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부자는 이 동포(同胞)에 불과합니다. 동포가 형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고 한결같이 곧 형제로 처하니 아버지는 끝내 스스로 그 교에서 나왔다. 성진에 사는 최현대(崔鉉戴)가 와서 그 일을 말하였다. 대저 아들이 된 자가 아비에게 울면서 간하여 잘못됨을 고치는데 이르게 하는 것이 정도(正道)이거늘 저 사람은 술책을 써서 고치게 하였으니 진실로 흠이 된다. 그러나 불효는 되지 않은 것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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