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류인석, 고종의 선유(의병해산 권유)에 따를 수 없는 이유
의병전 대패 후 서행길에 오르면서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
탁사 최병헌 목사의 선유사 활동. 의병활동을 회유하기 위한 당위성을 놓고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 까지 이렇다할 선유활동에 대한 명분은 나오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13도의군총재로 대한제국의 의병장으로 을미의병 때부터 후기 정미의병까지 의병전쟁을 선도한 의암 류인석 의병장의 뜻은 간과할 수 없다.
고종은 의암 류인석에게 의병해산을 권유했지만, 의암은 이를 따를 수 없다고 상소를 올렸다.
때는 1896년 병신년 5월. 의암 류인석 의병진은 오랫동안 근거지로 장악하고 있던 제천을 빼앗기자, 양서(兩西) 즉 황해도․평안도 서북지역으로 이동하는 서행길에 오른다. 서북쪽에서 재기할 것을 건의한 서상열(徐相烈, 1854~1896)이 선두로 서북지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7월 19일 청계(淸溪), 20일 원당(元堂), 21일 인제(麟蹄)를 지나 23일 낭천(狼川) 지금의 화천(華川)에 도착하였으나 그곳에서 관군(官軍)과 대대적인 전투로 선봉장 서상열이 전사하게 된다.
의암 류인석 의병장은 정선에서 고종에게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조정군인 장기렴 군대와 선유위원 정언조를 내려보낸 고종의 끝없는 선유에 의암은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이유를 밝히는데, 당초 여러 가지 변고로 인해 의병을 일으킨 상황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병을 멈출수 없다는 이유였다. 장문의 글 이지만 후일 정리를 위해 노트로 남겨 둔다.
소(疏)
서행(西行)할 때에 정선(旌善)에서 올린 상소(西行時在旌善上疏)
(병신, 1896. 5.)
삼가 아룁니다. 신은 농촌에서 사는 형편없이 어리석은 백성으로 지식이 없어 시무도 알지 못하며, 몸이 미천하여 국정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평소 한 일은 글이나 쓰고 읽으며 제사 지내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충성과 반역의 분수와 문명과 오랑캐의 예법과 같은 것에 있어서는 밝게 분별하여 굳게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적이 살펴보건대 오늘날 국가의 변고를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권신과 간신은 앞에서 전하의 총명을 가리우며 난적들은 뒤에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 표제는 신법(新法)의 개화(開化)이고, 그 시작은 대대로 원수인 일본 오랑캐입니다. 그 흉역을 빚어낸 것은 병자년(1876)에 싹을 틔우고, 갑오년(1894)에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애초에 금(金)나라 오랑캐가 송(宋)나라를 우롱하여 변란이 일어나고 소준(蘇峻)이 진(晉)나라를 핍박하듯이 우리 전하로 하여금 거짓 천자의 자리만 움켜쥐게 하고 컴컴히 가리운 곳에 깊숙이 쳐박혀 있게 하였습니다.
그 호령을 내고 명령을 베푸는 것은 오직 왜적 두목과 십적(十賊)일 뿐입니다. 이에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고 관제를 변하고 주군을 변혁하니, 한자 땅과 한사람의 백성도 우리 조종(祖宗)이 후손에게 넉넉히 하는 법도를 회복하지 못하는데도 버려두어 막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뒤에 작년 8월에는 곤위(坤闈 : 중전)께서 물을 수 없는 재앙을 당하셨고(명성황후 시해사건), 11월에는 전하께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욕을 받으셨으며, 아래로 공경(公卿)과 선비와 서민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물려준 몸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어, 휩쓸려 금수(禽獸)의 영역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 애통합니다. 어찌 차마 말을 하겠습니까?
(...중략...)
선왕의 전한 바가 이와 같이 중요하고, 보전하기는 이와 같이 어려웠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천명을 이어 받들었으니, 마땅히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하늘과 조종께서 부탁한 큰 뜻에 보답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재앙을 부른 것은 바로 신이 말한바 권신과 간신이 가리고 난적이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어찌 통곡하여 절치부심하지 않을 것입니까?
신은 일찍이 고(故) 감역(監役) 신(臣) 김평묵(金平黙)과 신의 당숙(堂叔) 고 지평(持平) 신 류중교(柳重敎)를 따라 고 참판(參判) 신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가서 공부하였습니다. 이항로는 유학계의 종장(宗匠)으로서 당시에 이미 오랑캐의 침입이 우려되는지라 항상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존화양이(尊華攘夷)에 마음을 두어 위로 고하고 아래로 타이른 것은 오직 이 의리뿐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신은 그를 쫓던 두 신하 즉 김평묵과 류중교를 사사했는데, 이 두 사람은 스승의 도를 삼가 지켜서 과거에 서양․일본과 화의하자는 논의가 한창 왕성할 때를 당하여, 혹은 선비들을 격화시켜 함께 간언하기도 하고 혹은 상소로 말을 다하다가 마침내 여러 소인들에게 노여움을 받아 말은 시행이 안 되고 몸은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제자 중에 홍재학(洪在鶴, 1848~1881, 자는 문숙(聞叔). 화서 이항로 선생의 제자로 관동대표로서 1881년 개화의 정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체포되어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참 됨)과 같은 이는 직간(直諫)하다가 극형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화친(和親)이 이루어진 뒤에 국사(國事)가 날로 그릇되자, 신의 선생인 신종숙 류중교는 오늘날과 같은 결말이 오리라고 마음으로 알아차렸으나, 구할 능력이 없어 한(恨)을 머금고 죽었습니다.
신에게 이르러서는 국가 변란의 망극함과 유학이 땅에 떨어짐을 직접 보게 되오니, 신의 통분함은 타인보다 더욱 심한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신은 마침 모친상 중이었으나 생각하기를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신하가 되지 못하며 형체를 보전하지 못하면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의리를 펴지 못하면 스승에게 배운 것을 지킬 수도 없고 선왕이 제정한 예의를 비록 마치고자 하여도 불가능합니다. 또 살펴보건대 조정에서는 주저하며 벼슬을 얻지 못할까 근심하면서 몸조심하고, 주현(州縣)에서는 퇴락하여 받들어 쳐다봄이 아니면 앉아서 보고만 있으니, 누가 삼천리 큰 강토와 오백년 동안 오래 배양한 중에 어찌 한 두 사람의 의사(義士)가 없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마침내 스스로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춘추(春秋)의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나 주살할 있다는 법과 후현들의 주장한 바, 먼저 시행하고 뒤에 보고하는 뜻을 취하여 원수를 갚으며 형체를 보호하는 깃발을 들고서 상복을 벗고 전쟁에 종사하게 되어 선비들을 모아 군대의 대열을 형성했으니, 이 어찌 군대의 일을 들은 적이 있어서였겠습니까? 진실로 사람의 도리가 퇴폐하려하고, 하늘이 내려주신 선심(善心)을 저버리기 어려워 망령되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의 적당(賊黨)을 죽이고 한 곳의 왜놈의 병참기지를 소탕하는 것으로써 적게나마 신인(神人)의 분노를 씻어서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임금의 원수는 마땅히 갚아야 하며 중화(中華) 정맥(正脈)은 마땅히 지켜야 함을 알게 함이 있으면 아마 전연 할 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윽고 전하께옵서 아관파천(俄館播遷)하시어 매우 놀랍고 위태로웠으나 역적 괴수가 조금 주살되고 전하의 말씀이 밝게 반포되어 기왕의 욕됨을 통탄하며 유신(維新)의 천명(天命)을 기원하였습니다. 온 나라 신민(臣民)들은 생각하기를 나라 안팎이 서로 바르게 되며 위아래가 서로 견고하고 종묘사직이 위태롭다가 다시 안정되며 생민이 도탄에 빠졌다가 다시 구제될 것을 서서 보리라 하였는데, 어찌해서 묵은 때가 한창 새로운데도 전장(典章)을 수복하는 결실이 없으며 남아있는 경계가 한창 엄한데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입니까?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고 방황하여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어서 선전관(宣傳官)을 사방으로 내보내고 군대로써 핍박하여 비도(匪徒 : 義兵을 指稱)로 지목하고 살벌로 위협하니, 원통합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전하의 마음이겠습니까?
신이 하는 바를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당초에 지키는 바가 있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고 끝에는 표준이 있어 급히 중지할 수 없으니, 지금에 급히 중지할 수 없는 것은 옛날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어째서입니까?
십적의 당여가 깔린 것이 아직도 그전대로이며, 왜놈의 병참기지가 연이어 있는 것이 아직도 그전대로이며, 정삭을 고친 것이 아직도 그전대로이며, 복색을 바꾼 것이 아직도 그전대로이며, 관제의 변경과 주군의 혁파가 아직도 그전대로입니다. 삭발(削髮) 문제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가슴을 아파하며 골치를 앓을 일인데도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편함을 따랐다고 하시고 급한 일이 아니라고 하시니, 이는 반드시 돌아보며 꺼려서 그러함이 있는 것입니다.
더하여 러시아 공관에서 궁전으로 돌아오시는 것도 여전히 늦어져서 궁정을 지킬 수 없으며 인산(因山)도 행하지 않아 전례(典禮)를 다 결여하고 백료(百僚)들이 도주하고 사방이 위험하며 의심하니, 국세의 위태함은 전보다 몇 배나 됩니다. 이 때를 당하여 의병(義兵)이 된 자가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의병을 일으킨 이래로 위급하여 방황하기도 하였으나 스스로 책임을 맡은 것은 적지 않습니다. 토적(討賊)하여 복수하는 것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전하의 적개심을 풀어 드리며, 곤전(坤殿 : 中宮殿)의 영혼을 거의 위로해 드리게 될 것이며, 동궁의 땅을 치는 정을 거의 펴드리게 될 것입니다. 존화양이(尊華攘夷)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국가의 옛 법도를 따르게 되어서 도도히 흐르는 광란으로 이미 엎어진 것을 거의 회복하게 될 것이며, 미약한 명맥이 거의 끊어지려는 것을 거의 보전하게 될 것입니다. 한스러운 것은 지모(智謀)가 장구하지 못함이며, 기계가 날카롭지 못함이며, 재용이 넉넉하지 못함입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그 투지는견고하여 빼앗을 수 없으나 그 성공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하기를 정예부대를 만들어 사기를 진작시켜서 흥복(興復)의 만일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뜻밖에 신제(新制 : 新式軍隊)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이 몇 백 명의 군대를 지휘하여 왕사(王師 : 왕의 정규 부대)라고 일컫고서 선유위원(宣諭委員)과 같이 와서 말하기를 먼저 효유하고 뒤에 토벌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선유(宣諭)는 의병(義兵)을 해산케 하려는 것이니, 의병이 한 번 해산되면 기강(紀綱)이 반드시 무너져 나라가 따라서 망할 것입니다.
우리 전하의 성명(聖明)으로써 이미 이를 묵묵히 헤아리실 것이오니, 어찌 진실로 이러한 선유가 있겠습니까? 설령 진짜 선유가 있었다고 해도 이는 측근들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서 오직 권세․이익의 견고함만 도모하고 패망하는 화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명을 빙자해서 중앙과 외방을 다스리는데, 신이 만약 선유를 받아들인다면 단단하게 외로운 충성이 난동의 무리로 귀결되는 것은 아깝지 아니하오나, 한갓 바르게 양성한 의리로 하여금 그 제지당함을 감당하지 못하여 전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면서 날마다 선유를 취소하시기를 복망하고 감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이 여기에 경건히 두려워하기를 더욱 절실히 하고 삼가 오신 사신에게 부탁하여 저의 정성이 상달되어, 미혹으로 이간됨이 없이 천심(天心)의 기쁨을 입을 수 있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아! 저 장기렴은 불량한 짓을 제멋대로 하여 기습해 격파하여 신으로 하여금 제자리를 잃게 하고 진취할 날이 없게 하였습니다. 아! 이제부터는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하여 토적과 복수를 하며 사도(斯道 : 儒道)를 위하여 존화양이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장기렴의 어리석은 한 번 행동은 만대의 충의의 길을 막고 백왕(百王)의 강상의 근본을 없이하는 것이니,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해서는 안 되고 또한 후대의 역사에 전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국가에 끼친 수치야 말로 과연 어떠합니까?
그러나 그 수치를 끼친 까닭은 신이 분수를 모르고 의병을 일으켜서 힘은 적은 데에 큰일을 도모한 것으로 말미암아 불러왔으니, 신의 죄가 그 첫째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인데 지금 신의 미충(微忠)이 성상전하께 비쳐짐을 당한 적이 없으니, 신의 죄가 그 둘째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초기에 성공과 실패를 예측할 겨를이 없이 오직 적과 함께 살 수 없다는 맹세만 하였습니다.
그 이래로 신의 무리 중 이춘영(李春永, 1869~1896)․주용규(朱庸奎, 1845~1896)․안승우(安承禹, 1865~1896)․홍사구(洪思九, 1878~1896) 등 여러 사람은 먹고 싶은 것에 곰발바닥과 물고기에서 취하고 버리는 것의 바름을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척촌(尺寸 : 조금)의 공효를 요행으로 바라면서 구차한 때에 생명을 부지하고 있사오니, 신의 죄가 셋째입니다.
저 장기렴과 같은 자가 신에게 죄를 얽은 것은 옳지 않아, 관찰사나 군수들은 십적(十賊)의 조아(爪牙 : 발톱과 치아 즉 앞잡이 졸개)가 되어 먼저 승복하고 같은 당여(黨與 : 一黨)를 죽인 자를 장리(長吏 : 높은 관리 또는 守令)를 죽였다고 하며, 관청의 돈과 곡식이 왜놈의 물자가 되고나서 국가 일에 끌어 쓴 것을 공화(公貨 : 公用 財貨, 公金)를 마음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신이 어찌 많은 말로 변론하겠습니까?
만약 하늘의 신령함을 힘입으며 전하의 복록을 이어받아, 많은 신하들과 마음으로 협조하며 죽을힘을 다하여 요사한 자들을 청소하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게 된다면, 신은 마땅히 대궐문 밖에 나가 엎드려서 조목마다 자세하게 진술한 뒤에 몸을 사패(司敗 : 審問과 刑罰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직위, 오늘날의 法官)에게 맡겨서 공손히 도끼로 목 베여짐을 기다리겠습니다.
신이 듣자오니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자기의 임금이 무례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 매가 참새를 쫓듯이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가에 있어서 주군이 당한 치욕은 무례할 뿐만이 아니오니, 신은 비록 백방으로 좌절을 당하고 십분(十分)이나 위험을 겪는다 해도 어찌 감히 한 목숨을 아껴 매와 같은 힘을 본받지 않겠습니까? 이제 역당을 옹호하는 자들은 자주 일컫기를 군부(君父)가 바야흐로 위태한 지경에 처해 있는데 만일 우리의 토벌을 시원히 하려 한다면 재화가 장차 헤아리지 못할지니, ‘고순(姑順 : 잠시 따름)’함이 나은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아! ‘姑順’ 두 글자는 실상 우리나라의 사직과 종묘를 망치며 인류를 멸망시키는 기본입니다.
지난 병자년(1876)에 일본의 통상 요청에서 그들의 군대를 동원함을 두려워하여 ‘姑順’하였고, 갑오년(1894)에 대궐을 침범하는 변고(갑오변란)에 이르러도 우리에게 이르기를 꺼리며 곡하면서 ‘姑順’하라고 하였고, 그 효과가 심지어 국모께서 시해를 당해도 ‘姑順’하였고, 군부(君父)께서 욕을 봐도 ‘姑順’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십 수 년 이래로 ‘姑順’한 공효는 근면하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화변이 생기는 것은 날마다 궁극으로 나아갔습니다.
신은 생각하옵건대 이 한결같은 절조의 ‘順’(순종)은 한결같은 절조의 ‘화(禍)’를 빚어낸다는 것입니다. 만일 애초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역시 애초부터 그 재화가 없을 것입니다. 가령 순종하지 않아서 재화를 취하더라도 순종하다가 재화를 벗어나는 것과는 함께 말할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순종이 오히려 재화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으나 하필이면 오랑캐가 되어서 망해야 하며, 죽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하필이면 금수가 되어서 죽어야 하겠습니까? 신은 이와 같은 애뜻한 마음을 가지고 전하께 한 번 아뢰고자 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다만 천지가 비색하여 뜬 구름(간신)이 해(임금)를 가리기 때문에 한갓 피맺히는 정성으로 하여금 글만 갖추는 조목으로 귀결되게 하여 주저하며 돌아보았습니다.
지금 위원(委員) 정언조(鄭彦朝)가 다시 선유(宣諭)를 받들고 이르렀습니다. 신은 감히 제(齊)나라의 우인(虞人)이 부르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는 의리를 본받아 구구하게 지켜 감히 변경할 수 없어서 매우 황송하와 몸을 둘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만 하고 만약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다면, 저의 충정이 쌓인 것도 마침내 드러내어 아뢰올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대강 들어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진달하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을 발휘하시어 이의(異議)에 흔들리지 마시고 구중궁궐로 돌아오시어 인산을 예로써 이루시고, 충신과 현신을 끌어 쓰시며 아첨하는 무리를 버리시고 간적들을 소탕하시며 발호하는 왜놈들을 몰아 죽여서 영원히 오랑캐의 제도를 금하시고 상쾌하게 문화를 숭상하는 치적을 이루시어, 공적은 조종(祖宗)에 빛나고 사업은 후사(後嗣)에 드리워져 우뚝하게 백대(百代) 중흥(中興)의 임금이 되십시오.
또한 신으로 하여금 분수를 지켜 무기를 놓고 물러나서 과거 학업을 닦게 하고 부모의 상을 치루어 선왕(先王)께서 제정한 예를 능히 마쳐서 충효의 죄인을 면하게 해 주신다면, 죽은 사람을 살려 뼈에 살을 붙여주는 은혜가 되어 감사히 떠받들기를 한없이 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매우 격렬하고 절실하고 두렵고 간절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장기렴 관군 부대에 대패
1896년 4월 13일
**1895년 12월 24일(음력) 의병운동을 개시하였다.
류인석의병진은 한때 3천명을 넘었으며,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일대를 석권하면서 친일적인 관찰사나 군수 등 ‘토왜(土倭)’들을 처단하여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격으로 최후의 거점인 제천성을 상실,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재기항쟁을 도모하기 위하여 서북지역인 황해도·평안도로 이동하였다. 그렇지만 서북지역에서의 재기항쟁도 어려워지자 청나라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갔으나, 그곳에서는 도리어 회인현재(懷仁縣宰) 서본우(徐本愚)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어, 같은 해 7월 28일 혼강(渾江)에서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의병해산 후에는 한인(韓人)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 1897년 3월 고종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하였으나 곧 이곳으로 재차 망명하였다. 1898년 10월에는 부근의 팔왕동(八王洞)으로 이주하였는데, 이곳에다 여러 성현(聖賢)의 영정을 봉사(奉祠)하는 성묘(聖廟)를 세우기도 하였고 한인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향약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을 피하여 귀국한 뒤로는 서북지역 각지를 돌며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주력하여 이진룡(李鎭龍)·백삼규(白三圭) 등의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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