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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변삼사 - 변괴(變怪)에 처하는 방법 세 가지

역사속으로

by 정홍철 2014. 10. 1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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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변삼사


의암 류인석, 이문중(李文仲)에게 답하다

기해년(1899) 6월 20일

별지(別紙)

연전으로부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오늘의 의거는 권도(權道)요 정도(正道)가 아니어서 십분 정당한 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만일 성옹(省翁 : 柳重敎)이 이 일을 당하게 되면 결코 선비들 사이에 유포시켜 하나의 안건으로 의논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의리에 크게 해가 될까 두려워함이요 일이 자기에게 관련되어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음을 싫어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대체로 오늘날의 변고는 사천년 중화의 제도와 이천년 성문(聖門)의 교학(敎學)과 오백년 조종(祖宗)의 전형(典型)이 끊어지게 된 것은 이미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또 국왕께서 무한한 욕을 받고 국모가 시해를 당하고 조정은 이미 모두 옷을 바꾸고 머리를 깎아 팔도에까지 미쳐 급한 바람에 타오르는 불과 같아 며칠 가지 않아 팔로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모두 금수가 되겠습니다.

아! 한 하늘 아래에서 홀로 예의가 있는 나라의 사람이 되었는데 이런 재앙을 만나니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 중에 선비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구차하게 자처하지 않을 것이요 짐승이 되어서는 아니 되니 차라리 죽음이 있을 뿐이나 죽음이 어찌 좋은 일입니까?

일신은 죽어 깨끗하다고 하겠으나 군신․상하․부자․형제․친척․사우(士友)의 억만 동포가 나라는 이적으로 되고 사람은 금수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겠으니 어찌 통분하고 급박하지 않습니까? 짐승이 되지 않으면 죽고 죽지 않으면 짐승이 되니 사람들은 모두 알아차리고 싫어합니다.

때문에 당시의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나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만 명이면 만 사람 억만 명이면 억만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의병이 일어나야 한다, 의병이 일어나야 한다.”하고, 또 말하기를 “나도 동참하겠다, 나도 동참하겠다.”고 하니, 그 추세가 부득불 그러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때를 당하여 이런 변괴(變怪)에 처하는 방법이 세 가지의 일이 있으니, 의거를 하여 구제하는 것과 땅을 피하여 면하는 것과 자진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도에 합치되어 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 마치 세 분의 어진 사람[三仁]이 행한 일은 다르나 함께 인(仁)으로 귀결된 것과 같습니다.

오로지 의병으로 말하면 공적으로는 천하와 국가가 장차 이적 금수가 됨을 면하기 위함이요, 사적으로는 나의 몸이 장차 이적 금수가 됨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사람마다 해야 할 의무요 사람마다 불가불 해야 할 추세니, 그 의무와 추세로 보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무엇이 그들을 치는 것만 하겠습니까?

진실로 만인의 입이 똑같이 그렇다고 한결같이 말하여, 그 일을 하는데 혹 뜻대로 되어 난적과 이적을 깨끗이 쓸어버리면 어찌 크게 다행할 뿐이겠습니까? 그 일을 하여 급한 것을 구제하면서 중화의 모습과 조종의 지킨 본보기로 하여금 몇 해 몇 달이라도 연기되게 하며 자신과 군신․상하․부자․형제․친척․사우의 억만 동포의 의복과 머리가 몇 해 몇 달이라도 보전되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는 불가불 해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의병들은 마음에 통분함이 있고 추세에 급박하고 의리에 가늠하여 일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서서 깨끗이 쓸어버리지도 못하니 천하의 지극히 원통하고 한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난적으로 하여금 의복을 바꾸고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강제로 맺은 조약을 정지시켜 몇 년 몇 달이라도 머리와 의복을 보전하고 연기되게 하면, 이는 의병의 한 일이 하지 않은 것보다 현명한 것입니다.

가령 아무 일도 없으면 어느 지경이 되겠습니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고 심장과 담이 모두 싸늘해집니다. 의병이 된 자는 스스로 미진한데 통렬한 한이 있으나 공통적인 인정은 이것을 다행으로 여김이 있을 것이요, 이것을 불행으로 여긴다면 이는 사람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저 난적의 무리들이 비도(匪徒)와 역당으로 지목하고 우리를 치고 쫓아내고 나쁘다고 하고 물리쳐서 기필코 용납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들의 간사한 계책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꾸짖을 것도 없습니다.

내가 시종 대동적(大同的)인 인심을 보건대 막 난적의 화가 위급할 때는 사람들이 모두 “의병! 의병!”하였는데 사류(士類)들이 더 심하였습니다. 의병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일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자신은 즐겨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화를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뒤에 난적에게 화를 받을까 두려워서입니다. 의병으로 인하여 화를 면하였다가 또 의병이 패한 것을 보면 잠깐 사이에 전날에 화가 급했던 것은 잊고 화를 면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한가히 앉아 이야기하면서, 심한 자는 말하기를 “의병이 비도(匪徒)요 역당이다.” 하면서 속으로는 난적의 뜻에 부응하고,

심하지 않은 자는 말하기를 “비도와 역당의 이름이 억울하나 선비의 깨끗한 행실은 아니다.”고 하고, 그 스스로 정론(正論)을 하는 자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이는 의리의 편이고 기절(氣節)이라고 이를 만하나 유학자의 도에는 위배된다. 유학자는 분수를 지킬 뿐이니, 어찌 위치를 벗어나 고생하며 소란을 피우는가?”라고 합니다.

이 몇 가지의 말은 난적들이 의병을 그르다하고 배척하는 것과 더불어 내외 상응하면서 반드시 의병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합니다. 의병을 방해하는 일은 정론이라고 하는 자가 더욱 심하고 심하지 않은 자가 버금이고 심한 자는 오히려 심하지 않고 난적은 사실상 더하거나 덜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시종 의병을 의롭게 여기는 자는 서민 중에 어리석고 둔한 자이고 선비 중에 천진(天眞)한 자들뿐입니다. 아! 저런 말을 하는 자는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필시 의리는 모르고 화복에 민감한 자들이며 필시 오래도록 마음을 빠뜨려 넋을 잃은 자들입니다.

또 말세의 인심이 서로 이론(異論)을 꾸미기를 좋아하여 척화(斥和)가 있은 뒤로부터 이의(異議)의 습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장차 난적과 이적이 될 처지에 대화(大禍)를 부추겨 방자하게 일어나 중화의 맥과 성도(聖道)․국가․인류를 위하는 일은 하지 않고, 대의를 억압하여 전날을 징계하면서 의병이 용납되지 못하게 하여 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끝내는 이 세계를 암흑으로 하고야 그칠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병과 난적이 교전할 때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어찌 인심의 부정함과 천리(天理)의 밝지 못함이 이와 같이 극에 이릅니까? 오직 우리의 무리인 선비들은 화서․중암․성재의 세 분 선생님이 도와 나라를 걱정한 고심과 혈성에서부터 중화는 이적이 될 수 없고 사람은 짐승이 될 수 없는 의리의 외침에 전후로 의병이 있었으니, 비록 남들이 그르다하고 배척을 받더라도 뉘우치지 않고 한 갈래의 큰 계통이 되어 오늘의 대화(大禍)를 만났더라도 다만 이적과 짐승이 되는 것은 면하기를 요할 따름입니다.

이적과 짐승이 되는 것을 면하기를 요하면 부득불 위에 말한 세 가지의 일을 위하여 평상의 인정으로 헤아려 보면 다만 일신만을 깨끗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군신(君臣)․상하․부자․형제․친척․사우(士友)의 억만 동포들과 함께 이적과 금수가 되는 것을 면하는 것이 의당 지극한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병은 십분 정당하여 해야 할 일이요 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만약 권도(權道)를 쓰는 것과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이 스스로 분수가 있어 유학자로서의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는 그렇지 않음이 있습니다. 대저 의병을 한다든가 자진하는 것이 정도와 권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정도와 권도의 분별은 설명이 매우 깁니다. 한유(漢儒)들이 말한 권도와 권술(權術)이 정도에 해가 된다는 것은 말할 것이 못 됩니다.

우리 유학자가 말하는 권도는 정도와 서로 돕는 것으로서 권도가 곧 정도요 정도가 곧 권도로서 하나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원래 분수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이하게 말하면 정도(正道)는 정상이지만 권도(權道)는 정상으로 될 수는 없습니다. 정상(正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지켜도 폐단이 없지만 정상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쓸 때에 마땅함을 얻지 못하면 심히 해롭습니다. 그러나 정도라 하더라도 그 정상으로 할 수 있는 것만 믿고 굳게 지키기만 하면 때로는 도에 해로움이 있고 권도를 정상으로 할 수 없다고 하여 변통하는 것을 금하면 또한 반드시 도를 해치게 됩니다.

오늘의 의병에 대한 일은 권도를 쓰는 부류는 아니지만 이 몇 가지와 비슷함이 있는데 그 시대와 의리의 급함은 이 몇 가지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만약 백대의 공정한 안목으로 의논을 하면 의거하는 일과 자정(自靖)하는 일은 모두 도에 합합니다.

자정하는 것도 도를 해치는데 돌아가지 않고 의거하는 일도 편법(偏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이와 기자(箕子)가 신복(臣僕)이 되지 않은 지조를 지킨 것은 동일한 정도(正道)입니다. 논하는 자들이 백이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기자에게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은 백이가 말을 잡고 간한 것은 그르게 보고 기자가 홍범을 진술하여 무왕에게 고한 것은 허여해서입니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나라와 도를 위하여 나가서 큰 싸움을 한 것과 주무왕이 후백(侯伯)의 제후로서 일어나 큰 변혁을 일으킨 것[虎變之大人]은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있으나 권도가 되는 것은 일반입니다.

지금 자정하는 것이 정도라는 것만 지키고 의병이 권도라고 말하는 자는 불행하게도 백이에 대하여 편견이라고 말하는 데에 가까우나 그렇다면 기자도 편견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정상의 경(經)은 편법의 권도(權道)로 더불어 서로 도와야 하니, 사실상 성인이 아니면 능히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권도는 진실로 성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듣건대 성인만이 홀로 행하는 권도가 있고, 사람마다 행하는 권도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의 대화(大禍)는 사람마다 당한 일이라, 소위 난적은 사람마다 죽여야 하니, 오늘의 권도는 사람마다 행할 수 있는 권도입니다. 사람마다 행해야 하니 비록 성인이라도 불가불 행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의 선비라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자정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니 나는 자정을 위하여 죽는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죽음으로 자정하면 좋은 일이 아닙니까? 사람마다 모두 죽으면 큰 화는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뒤에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정하여 죽는 것은 말은 쉽고 실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온 나라 가운데 어찌 그런 사람이 적을까마는 사람마다 모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또한 믿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 변을 당한 처음에 나의 친구 안계현(安啓賢)과 이보경(李輔卿)이 말하기를 “자정(自靖)하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고 차라리 의병을 일으켜 핍박의 형세에 몰려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명언이라고 칭찬하였는데 과연 다 순절하여 말대로 실천하였습니다.

또 평산 사람 신택희(申宅熙)는 나의 친구 신언명(申彦明)의 아우입니다. 유학자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선비들에게 의거할 것을 권하여 선비들이 많이 자정하여 죽을 것이라고 말을 하였는데 이 사람이 크게 분개하여 말하기를 “자정하여 죽는다, 자정하여 죽는다고 하는데, 나는 머리를 깎이더라도 두 눈으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정하여 죽는 것을 보고 내 손으로 묻은 뒤에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온 세상의 선비들이 혹 안계현․이보경․신택희에게 죄를 얻을까 두렵습니다. 자정함이 귀중하다는 것은 진실로 도리가 중함을 알고 생사로 이적과 금수가 되는 것을 바꾸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도리가 중함을 알고 생사로 이적과 금수가 되는 것을 바꾸려하지 않으면 그 형세는 반드시 의병을 일으켜야 하고 또한 반드시 의병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의병은 그 마음이 도리가 중함을 알고 나가서 장차 의리를 잡으려 하며 또 대중으로 더불어 이적 금수가 되는 것을 생사로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생사와 이적 금수를 관계하지 않는 자들이니, 또한 어찌 의병에 관계하겠습니까? 자정(自靖)과 의거는 하나의 의리로서 서로 안과 밖이 되는 것이니, 때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처지를 바꾸면 모두 그렇게 하니, 자신을 깨끗이 하는 데로 돌아갈 뿐입니다. 마땅히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함에 예리함이 쇠도 끊는다[二人同心 其利斷金]’고 해야 합니다.

돌아보건대 모두 의병을 억제하여 용납할 곳이 없게 하니, 이 같은 자는 비록 자정(自靖)한다 하더라도 나는 참으로 의리의 중함을 알며 이적 금수가 되는 것을 사생으로 바꾸지는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성재(省齋) 옹(翁)께서 살아 계셨다면 결코 의병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하니, 더욱 그 말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옹(省翁)께서 하시고 하시지 않는 것은 스스로 헤아려서 하였을 것이요 후학으로서 알 바는 아니나,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 불가합니다. 성옹은 진실로 일을 잡거나 일을 만들지 않은, 일이 이르면 또한 구차히 피하지도 않습니다.

당일의 일이 과연 의리가 아니고 도에 위반된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실로 의롭고 도에 합치된다면 어찌 결코 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겠습니까? 성옹께서 큰 역량과 큰 인심(仁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큰 역량과 큰 인심이 있으면 옛날에 탕왕과 무왕이 비록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하였으니 천명과 인심이 돌아가면 시행하였습니다.

하물며 오늘의 변은 하늘과 신이 진노하고 억만의 인심이 들끓어 의거의 일이 있기를 희망하여, 그 의리가 또 국가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천하를 위하여 중화의 맥을 보존하는데 있어서야 더 할 말이 있습니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하지 않았다면 이는 어진 마음이 없는 것이요,

할 능력이 없어 하지 않았다면 역량이 없는 것이니, 어찌하여 우리 선생님을 실추되는 곳으로 밀어 넣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성옹께서는 그것을 하셔서 인덕(仁德)과 역량으로 반드시 조화가 있어 몇 해 몇 달을 연장하여 보전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여기에 그친다고 해도 군신․상하․부자․형제․친척․사우(士友)의 억만 동포에게 기꺼이 옷과 머리를 보전하여 사람의 모습을 보전하도록 하셨을 것이고, 차마 옷을 바꾸고 머리를 깎아 짐승의 모양이 되는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니, 아마 또한 자신만을 깨끗이 하는 것을 좋아하여 결코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성옹(성재 류중교)의 마음을 헤아려보건대 당일의 변에 반드시 의병이 일어날 것을 바랬을 것입니다. 이미 의병이 일어나기를 바랬으면 의병이 일어난 뒤에 어찌 찬양을 마지않음이 있었겠습니까? 반드시 말씀하기를 “이 의거는 십분의 도리가 아니니, 권도(權道)요 정도(正道)가 아니다. 나는 결코 하지 않으리라.”고 함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일에 도움이 되며 도리어 해로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난적과 대항하는 자를 의도(義徒)․의적(義賊)이라고 부르는데, 교전할 때에 불행히도 당시 사람들이 몇 건의 말이 있어 온 나라로 하여금 시비를 현혹하게 하였습니다.

믿는 것은 우리의 무리인데, 또 우리로부터 무엇이라고 운운함이 있어 시비를 어지럽게 함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대개 우리 무리 중에 처음에는 자신을 하였다가 당시 사람들의 말에 의하여 스스로 의심을 하고, 스스로 의심을 한 자는 끝내 자신을 그르게 여겼습니다.

외인들은 말하기를 “저들 속에 무엇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시비의 귀결됨이 결정될 것이다.”고 할 것입니다.

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리는 이 세상에서 오직 화서의 문하에서 책임을 질 것이고 사람들도 또한 화서의 문하에서 한다고 합니다. 오늘에 이르러 난적들이 미워하는 것도 화서의 문하이고 꺼리는 것도 화서의 문하 사람입니다.

때문에 변을 당하던 날에 항와(恒窩)께서 말씀하기를 “적선을 하는 집에 반드시 경사가 있으니, 의병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있으면 반드시 화서의 문하에서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후에 화서의 문인들이 전의 일을 경계한다면 어찌 다시 의거의 일이 있겠습니까? 화서의 문하에서 일어남이 없으면 기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후에는 난적들이 더욱 기탄함이 없어서 다시 큰 화(禍)를 일으킬 것이니, 화를 일으키는 날에는 그 때의 사람이나 우리의 무리가 의병이 일어나기를 바라겠습니까? 바라지 않겠습니까? 바래지 않는 것도 그르지만 바램이 있어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 때의 일은 속담의 이른바 ‘제 손으로 머리 깎기(自手削髮)’가 될 것입니다.

어떤 큰 도적 떼가 한 마을에 들어와 짐승을 도살하고 약탈하면서 못할 짓이 없었는데, 혹자는 피하고 혹자는 편히 앉아 있다가 다치고 혹자는 대중을 불러 한 바탕 맨손으로 싸워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피한 사람과 편안히 앉은 사람이 도리어 칭찬하지 않고 나무라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재물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할지언정 어찌 저 추악한 도적과 더불어 맨손으로 싸우면서 체모를 잃을 수가 있을까?”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도적을 쫓은 사람은 머리를 움츠리고 기색을 잃었습니다.

도적이 그 사실을 알고 기탄없이 다시 쳐들어 왔으니, 이것이 오늘의 비유가 됩니다. 정상적인 견해로 말하면 마땅히 입을 열어 말할 만합니다.

오늘의 의병은 십분 정당합니다. 만인이면 만인이 일어나고 천 번이면 천 번 일어나 함께 움직이고 떨치고 격려하여 먼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얻게 하고 뒤에서 바라보는 자는 기운을 얻어 참여하게 하여 우리의 쇠한 사기를 강하게 하고 저들의 진행을 어렵게 하여 이런 일이 절대로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오늘처럼 큰 환난이 있다하더라도 유자(儒者)들이 추구하는 것은 십분 정당한 도리가 되는데, 결코 의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의론을 세워 백대의 법으로 한다면 사람들이 누가 즐겨 의거를 하겠습니까? 유자가 해서 안 될 것은 절로 정당하지 못한 일로 귀결되는 것이니, 이제부터 마땅히 의병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이 일은 백대(百代)에 관계가 되어 오늘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죽을 각오를 하고 자정(自靖)하는 자를 실제로 많이 얻지 못하고 의병을 일으킴도 이로부터 못할 것이니, 천하의 일을 알겠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건대 오늘의 의거는 만인이 모두 말하기를 “십분 정당한 도리가 아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십분 정당한 도리이다.”라고 합니다. 도리는 비록 정당하지만 사람들이 다만 정당하지 못하여 스스로 무한한 실패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부끄러워 죽고자 하였고, 항상 친구들의 격려를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친구 사이에 마땅히 편지로 하고 얼굴을 대하여 격려의 말을 다해야 하고, 천하의 공적인 일이 되는 양맥(陽脉)을 유지하고 음기를 억제하는 잣대에 이르러서는 불가불 살펴야 하겠습니다.

일이 자신에게 관계되는데 이처럼 장황하게 말을 하니, 더욱 남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득과 실은 백대를 기다리는 것이니, 이 사람이 지극히 어리석으나 어찌 득실을 위하여 하겠습니까? 사실상 천하의 무궁한 걱정을 위해서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형의 뜻은 어떠합니까? 다시 항와와 더불어 한 번 자상하게 토론하고, 만일 혹 이 말이 무리함이 되지 않는다면 곧 명확하게 말을 해서 선비들 사이의 유전하는 의논을 바로 하면 다행하겠습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의거는 좋은 주제(主題)이지만 잘 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저는 듣고 말하기를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다만 양맥을 유지하고 음기를 억제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말하기를 “좋은 주제다.”고 하였으면 부득불 해야 합니다.

사람은 똑같지 않아 잘하는 사람도 있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제(詩題)를 걸어 놓고 한․위(漢․魏) 시대의 사람에겐 한위 시대의 시를 짓게 하고, 진․당(晉․唐) 시대의 사람에겐 진․당 시대의 시를 짓게 하고, 송․명(宋․明) 시대의 사람에겐 송명 시대의 시를 짓게 하고, 시골의 수재에겐 시골 수재의 시를 짓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효의 일로 말하면 순제(舜帝)가 행한 효는 대효가 되고, 증자가 행한 효는 다음이 되고, 왕연(王延)과 설포(薛包)가 행한 효는 왕연․설포의 효가 되고, 시골 사람의 한 가지의 효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그의 효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의병이 난적을 치고 원수를 갚아 중화의 맥을 잡고 이적을 정벌하는 대의는 사람마다 당한 환난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 성인의 큰 덕량으로 당했다면 반드시 잘 처리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잘 해내지 못함이 있습니다.

잘 하지 못 하는 것도 다양합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의병으로 일어섰다가 나중에는 적에게 붙어 도리어 의병을 해치는 자도 있습니다. 그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도 아는 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 말의 뜻은 의병을 칭찬하는 데서 나온 것이고, 잘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잘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니, 하지 않는 것보다는 어느 쪽이 낫습니까? 의병을 한 자는 사람마다 모두 공이 되니, 사실상 이적을 치고 양주(楊朱)․묵적(墨翟)을 막는 성인의 무리입니다.

비록 그가 처음에는 의병을 하고 나중에는 배반한 자라도 공은 공이요 죄는 죄입니다. 죄를 가지고 공을 가릴 수는 없으니, 효도하는 일이 비록 순제(舜帝)나 증자 같지는 않더라도 진실로 한 가지의 효행이 있으면 불효의 외에는 모두 효라고 할 수 있어서 매우 좋은 일입니다.

만약 의병을 억제하려는 뜻에서 나와서 말하기를 “저들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라고 하면 이는 순제나 증자 이하의 효는 모두 불효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정사(政事)에서 해치는 것입니다.

지금 중화와 이적, 사람과 짐승, 충신과 역적, 의병과 난적이 교전할 때에 그 피해가 어떠하겠습니까? 아! 저 난적과 이적들은 죄를 범한 것이 만 가지나 되지만 사도(斯道)를 멸한 것이 가장 커서 한 때에 그칠 일이 아닙니다.

군왕을 해치고 중국을 어지럽힌 것은 실로 만대를 가도록 제왕의 난신이고 천지간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입니다. 난적과 이적을 정벌하는 자는 충과 효에서 직분을 다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한 때의 충효가 될 뿐이 아닙니다.

순제(舜帝)는 악한 것을 숨겨주고 착한 것을 드날려서 순제의 위대함은 두 가지를 잘하였기 때문이나, 그의 선(善)이라고 하여 어찌 다 만족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드날리는 일은 대지(大知)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 시비는 스스로 그 형체가 정해져 있으나 선하고 옳은 것이라 하여 반드시 완전히 선(善)하고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 선하고 옳은 것을 부여잡고 악하고 그른 것을 억제하는데 있어 다만 선한 것을 선하게 여기고 불선한 것을 선한 데서 찾지 않을 것이며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옳지 못한 것을 옳은 데서 찾지 않을 것입니다. 악하고 나쁜 쪽도 꼭 다 악하고 나쁜 것이 아니니, 꼭 악하게 여기고 나쁘게 여길 뿐입니다. 옛사람들은 주자와 송자에게도 이런 잣대를 썼으니 특별히 쇠하여 가는 세상에 그렇게 아니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선과 옳은 것을 잡고 악과 나쁜 것을 억제하는 잣대에 실수가 있으면 비록 공정한 여론이라 하더라도 편벽되게 여기고 싫어하여 난적의 편도 아니요 주인의 편도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의 아는 것은 허여하지만, 그들의 선하고 옳은 것을 잡고 악하고 그른 것을 억제함이 어떠한가를 알고자 합니다.

<부선억악(扶善抑惡)>을 잘하지 못하는 자가 애초에 어떻게 내가 잘한다고 하면서 하겠습니까? 사람마다 마땅히 해야 할 과제를 당하여 할 마음이 없어서는 아니 되며 그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일은 급박한데 천천히 잘하는 사람을 기다려도 아니 됩니다.

비록 자기가 잘하지 못하더라도 우선 먼저 하여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잘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면 어찌할 수 없이 그대로 잘하지 못하는 사람의 손으로 하게 되어 마침내 잘하지 못하는 대로 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이 말이 있는데 이 의병의 일은 유학자는 마땅히 해서는 아니 되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지만, 내가 반드시 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남이 하는 것을 만류하는 것이지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남이 하는 것도 만류하고 스스로 하지도 못하니, 이와 같은 마음으로는 기필코 하지 못합니다. 이런 때에 이르러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누구에게 미룰 것입니까? 하지 않으면 잘하지 못함이 경우를 지나치는 일이 아울러 없게 될 것입니다. 아! 차마 말할 수 있습니까?

때문에 잘하지 못하는 것을 알지만 후회할 여유가 없으니, 사실상 만 번 죽더라도 여한이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종묘에 화재가 나서 신주와 제기가 탈 지경일 때에 들어 옮길만한 자가 힘이 있으면 정보(正步)로 걸어가겠지만, 힘이 없는 자가 들어 옮김에 일곱 번 엎어지며 여덟 번 넘어짐을 보면 대중이 웃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에 있는데 내가 사랑하고 믿는 마음으로 보면 사랑하고 믿을만한 일이 있지만 내가 싫어하고 의심하는 눈으로 보면 머리 털 하나하나와 일거일동이 싫고 의심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공평한 눈으로 보면 싫고 의심나는 일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大體)는 사랑하고 믿을 만한 것입니다.

옛날에 화서 선생이 강의하는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선배의 처한 일의 잘잘못을 논하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네의 말이 틀렸다. 지금은 정도를 붙잡고 사설(邪說)의 억제를 시비할 때이다. 예를 들면 여기에 도적이 있어 쫓아내는데 권력이 있는 자는 안색을 바로하고 한 번 호령하여 쫓아내고, 권력이 없는 사람이 쫓는 데는 그 형세에 절로 잘잘못이 있게 된다.

다만 도적을 쫓은 공을 논할 것이요 주인을 위한 사람 편임을 볼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선을 유지하며 악을 억제할 때에는 진실로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하지만, 자기의 일에 있어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시끄럽게 자기의 입장을 밝힌다고 잘못한 것이 잘한 것이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답하기를 “잘하고 잘못한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닌데 하필이면 입장을 밝히며 또 하필이면 여러 말을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과 도적을 철저히 판별해야 할 때니, 판별하지 못하면 화가 하늘에까지 닿을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의병들은 비록 잘한다고는 하지 못하나 분명히 주인의 편 사람이요 도적의 편 사람은 아닙니다.

선을 유지하며 악을 억제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면 일이 자기의 한 몸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으로 시끄럽게 떠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걱정되는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과 같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제가 비록 불초하나 어찌 자신을 위하여 불선한 것을 감추고 선한 것을 밝히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나에게 관계되고 한 일이 있어 묵과할 수도 없고 또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바도 있습니다.

옛날에 맹자가 윤사(尹士)와 순우곤(淳于髡)의 무리에게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변론하여 물리쳤습니다. 외인이 모두 호변(好辯 : 변론을 잘함)으로 지목한데 이르러서는 제자인 공도자(公都子) 같은 어진 사람도 질문이 있었으니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거듭 호변하는 부득이한 이유를 말하고 세 성인(聖人 : 우왕․주공․공자)의 일을 계승한 자라고 밝혀 외인들의 현혹된 것을 깨우쳐 주려함입니다.

자기의 공을 밝힐 뿐만 아니라 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는 자는 성인의 무리라고 말하여, 사람마다 말을 하게 하여 함께 공이 있는 데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도가 밝혀지지 않아 인심을 바르게 하며 사설(邪說)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불의를 맹자가 말하였겠습니까? 이것도 한 가지의 도리입니다.

돌아보건대 사람은 성인과 범인으로 나뉘어지고 하는 일도 거기에 따라 득과 실이 있으니, 어찌 감히 맹자의 하는 일을 할까마는 특별히 지금은 소위 중화와 이적, 사람과 짐승, 충신과 역적, 의병과 난적들의 교전이 맹자 시대의 이단과 사설이 정도(正道)를 해치는 것보다 심하여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고심을 아는 자는 나에게 시끄럽게 한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계(錦溪) 형은 나의 처지를 아는 자이기에 장황하게 두 번이나 말하는데 이른 것입니다.

사우(士友)들의 말을 듣건대 의거하다가 패할 경우 외국으로 가는 사람은 국내에서 자정(自靖)하는 것을 졸렬하게 여기고 국내에 있으면 일이 막힌다고 하면서 자기의 하는 일만이 훌륭하다고 하였다는데, 이는 인석이 전날에 입에서 내거나 마음에 둔 일이 없으니 어찌하여 이런 말이 있습니까? 아마 여기에 왕래하는 사람이 사리를 모르고 혹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까? 대저 사람의 견해는 자기가 하는 것을 옳게 여기나니, 사리를 모르는 자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였다면 진실로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인석이 우연히 자정(自靖)․부해(浮海)․의거(義擧) 세 가지를 말하였는데, 만약 공자로 하여금 이런 때를 당하였더라면 바다에 떠서 먼 섬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한 말은 있었습니다.

대개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닐 때 필힐(佛肹)에게 가려하였고 공산불요(公山不擾)에게 가려 하였고 누추한 곳에 살려고 하였고[居陋] 뗏목을 타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 뜻[乘桴]으로 보면, 바다의 섬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혹 할만 한일입니다.

의거를 할 때에 일이 성공되게 하고자하여 사우(士友)들이 일어날 것을 바라면서 절대로 자정하는 마음을 졸렬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처음 의리에 처신하는 일을 의논할 때 세 가지[자정․부해․의거]의 일로 삼인(三仁)에 비유하였으니, 어찌 이런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이런 마음이 없었는데 어찌 이런 말을 꺼냈겠습니까? 의거에서 실패하고 요동으로 들어가서 앉아 생각하기를 ‘고국에는 의병들이 흩어진 뒤에는 머리를 깎으라는 환난이 꼭 다시 일어날 것인데 요동에는 면할 것 같다.’고 하였으므로, 항상 사우들에게 편지를 하여 여기에 오게 하여 만나려고 하였고, 탄식하면서 말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재앙이 조금 완화되어 오늘과 같이 지낼 수 있다면 사류들이 국내에 있으면서 의를 지킴이 당당하게 추세를 이룰 것이고, 옷과 머리를 유지하게 되면 극히 좋은 일이요 국내에 머물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두 번째 요동에 간 뒤에 시를 지어 이르기를

所賴錦恒同虎猛  믿는 바는 금계(錦溪)․항와(恒窩)가 사나운 범 같아서

可令不懼國人情  국내의 사람들의 심정을 겁먹지 않게 할 수 있으리

라고 하였습니다. 

또 <잡록(雜錄)>과 선비들에게 준 편지에 말을 하여 나라 안에 있거나 나라 밖에 있거나를 물론하고 중화의 전형(典型)을 보전하면 그 의리는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중간에 또 ‘시골 선비를 부르고 부른다[招招巖穴士]’라는 시가 있었으니, 이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일한다는 뜻이지 사실상 다른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습재(習齋 : 李昭應, 1852~1930)가 말하기를 “도진(桃津 : 兪致慶, 1848~1910)이 금계와 항와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자진(自盡)하여 도를 위해 순사(殉死)하는 일은 일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지 이 도가 쇠망한 것을 구제할 수 없으며 몰락하는 이 사람들을 건질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것은 어찌 자정(自靖)하는 것을 졸렬하고 막힌 견해로 보지 않은 것입니까? 그리고 보는 자들이 어찌 이와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 이 편지를 필시 보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잘 검토하지 않았습니까? 지난번에 나는 금계(錦溪) 어른과 함께 이 편지를 보고 생각하기를 ‘이는 자정하는 일을 열등하게 보는 것이니 불합리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또 자정하여 순도(殉道)하는 일은 바로 이 도를 유지하고 인류를 깨우쳐주는 것이니, 어찌 구제하는 일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미 도를 다하였다고 말하고 또 쇠망한 도를 구제할 수 없다고 하니, 서로 모순이 됩니다. 이 단락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하였습니다.

인석은 말하기를 “이 편지는 내가 눈으로 거쳐 보았는데 분명히 우열로 말하지 않았고, 자네와 금계 어른의 견해가 분명치 못한 것이다. 이는 오로지 좋은 뜻에서 나왔지 어찌 남들이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였느냐? 다시 자세히 볼 것이다.” 하니, 오래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잘못 보았습니다.

그 때에 바쁘게 보고 지나가느라고 다만 해당되는 구절만 보고 위아래의 문세는 미처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위에 십분 정당하다고 말한 것은 자정(自靖)과 나라를 떠나서 지킨다는 두 가지 이외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우열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근거하면 유도(儒道)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과 이 인류를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은 다만 몸은 도를 위하여 순사(殉死)하지만 나라가 이적이 되고 사람은 금수가 되는 데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아래 말과 비교하면 자정이 어찌 광대하고 여유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이를 따라 하면 나라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요, 나라를 떠나서 의리를 지킬 수 있으면 떠나가 지키면서 여지(餘地)를 기다린다.”고 한 것이요, 자정의 도가 본래 협소하고 흠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또 말하기를 “나라를 떠나가서 도를 지키는 것이 좋다는 것은 뜻이 같은 사람에게 권하여 정당한 가운데에 그 취사(取捨)가 있게 하고자 한 것이니, 편지의 어세(語勢)가 스스로 이와 같습니다. 설령 글귀가 본의(本意)에 투철하지 못함이 있더라도 실상은 좋은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른 바 말을 가지고 본 뜻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인지라, 과연 견해가 분명치 못한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사우들의 말이 혹 이 편지로 말미암아 그런 것입니까? 이 편지 때문이라면 다시 한 번 취해보셔서 그 말의 뜻을 이해하여 사우들의 의심을 설명해 주소서.

<국역 의암집(제천문화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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